2008년 02월 08일
조선선비 살해사건

이덕일씨 책은 거의 다 봤는데, 역사를 모티브로 삼으면서 전문성 - 재미 - 관점에서 모두 만족하기가 정말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이세가지를 다 만족시키는 몇 안되는 책이 아닌가 싶다. 재미가 없는 책이라면 역사비평 류가 있고, 전문성이 없다면 여름에 읽은'유림'이라는 소설 따위(뒤에 또 쓸일이 있을 게다)가 있고, 관점이 엉망인 것들은 부지기수다. (2005. 9. 15. 자포스팅 中)
조선 500년을 이야기할 때 손꼽히는 비운의 인물은 누구일까. 혹자는 이상사회를 꿈꾸다 한 칼에 베인 정도전을, 혹자는 믿던삼촌에게 왕위에서 쫓겨나 첩첩산중에서 스스로 활시위로 목을 매야했던 단종을, 혹자는 정치적 소수자로 소수정권을 지켜나가다쿠데타로 실각한 광해군을 꼽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느것보다 드라마틱하고 잔혹하며 비정한 이야기는 바로 친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목말라 죽은 사도세자 이야기가아닐까? 그래서 사도세자 이야기는 역사드라마의 단골 메뉴였으며, 한중록 - 혜경궁 홍씨가 지은 서간문 - 이라는 이름으로 여러차례 방영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한중록은 '閑中錄' 즉 한가할 때의 기록이다. 이에 대해 아들 정조가 즉위한 후 한가할 때 쓴 글이기 때문일 뿐이라는주장도 있으나, 남편의 죽음을 기록한 서간에 한스러울 한(恨)자가 아닌 한가할 한 자를 사용한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있다. 실제 혜경궁 홍씨의 부친인 홍봉한과 숙부인 홍인한은 사도세자 폐출 및 사사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였고, 정조 즉위 후홍인한이 축출되는 과정을 볼 때 혜경궁(및 그의 일족)과 사도세자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이덕일역시 이 관점에서 책을 쓰고 있다.)
이덕일. 그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이 피비린내나는 조선중기 권력다툼의 현장이었다. 드라마가 사도세자의 정신병력, 영조의편벽함을 부각시켜 한 편의 에피소드로 사건을 끌고가는 것과 달리, 이덕일은 사도세자와 소론, 남인으로 연결되는 정치집단과 영조,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집단간의 파워게임으로 이 사태를 분석한다. 사실 영조는 탕평책을 사용하였지만 그 스스로가 경종(장희빈의아들) 사후 권력공백을 틈타 노론을 등에 업고 즉위한 한계가 있었고 자신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아들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것이다.
아무튼, 이자리가 그의 저서 '사도세자의 고백'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도록 하자. 어찌하였든 이덕일이보여준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능, 쉽게 전달하는 말솜씨, 사료를 수집하는 성실함은 꽤나 강하게 각인되었고, 이후 저자의 책을스스럼없이 선택하게 되었다.
제목만 선정적인 조선선비살해사건
그런데 이 책. 까놓고 말해 새 책이 아니다. 혹시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동일저자의 책을 본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책 역시새 책이 아니다. 이미 이덕일은 1999년 '누가 왕을 죽였는가', 1998년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라는 책을 각각 펴낸바있다. 앞 두 책의 개정증보판(?)이 이 책들이다.
(비록 저자는 개정증보라고 주장하나 내 눈에는 사실상 재출간에 가까워보인다.)
조선선비살해사건에 대한 서평을 보면 '추리소설인줄 알고 샀는데 아니라서 당황했어요, 그렇지만 읽을만한 책이에요'라는 웃지못할언급들이 있다. 출판사 마케팅에 점수를 매기라면 꽤나 높은 점수를 매기겠지만 책과 제목의 상관성을 평하라면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을테다.
결국 이 책을 제대로 설명하는 제목은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인 것이다.
(참고로 이덕일은 후속작으로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쓴 바 있는데, 나중에 이걸 어떤 제목으로 우려먹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함께 지켜보자.-_-;)
원래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라는 책 자체가 조선사를 이분해서 그 전반기를 다룬 것이고 나머지 절반을 '당쟁으로 보는조선역사'로 펴서 책을 냈는데,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라는 책을 '조선왕독살사건'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대박을 친 전작의후속편으로 광고를 때리며 재출간하다보니 '조선선비 살해사건'이라고 이름을 지어버린게다. 그러다 보니 사실 조선선비 살해사, 즉사화는 연산군 집권 이후부터 일어나는 일임에도 이 책 1권은 조선건국 ~ 세조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러니 어떤 서평에서처럼 '왜조선선비살해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사화를 다룬다면서 1권 내내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이다.이부분은 저자와 출판사가 반성해야할 부분이라고 본다.
(뭐, 나야 예전에 한번 본 책이라 생각하고 도서관서 빌려봤으니 사실 난 뭐 특별히 사과받기는... 쿨럭)
신권과 왕권의 대립, 그 지난함에 대하여
조선초를 다루는 대부분의 역사서는 결국 신권이냐, 왕권이냐 를 이야기하다 한 편을 드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진다. 이덕일은 이 문제에대한 해답을 명쾌히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 또한 이 대립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어보인다. (교양서 중 신권짱을 외치는 책으로는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 등이, 왕권만세를 부르짖는 책으로는 이한우의 '태종' ,'세종' 등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른교양서에 비해 왕권강화가 바람직한가, 신권강화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가치판단을 삼가면서 다만 도도히 흘러가는 역사적 물줄기는신권의 확대 및 사림의 등장일 수 밖에 없었다는 주제로 책을 끌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신권이냐, 왕권이냐의문제가 아니라 기득권에 안주하는 수구세력이냐, 사회문제를 극복하려는 개혁세력이냐임을 설파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또다른 블로그 서평에서는 386세대로 대표되는 개혁세력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여졌던 책을 재탕하다보니 뭔가 좀지금 시세에는 생뚱맞아져 버렸다는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가 시세영합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믿음은가지고 있다.
이덕일의 조금은 안타까운 행보
그러나 요즘 그의 행보가 위태롭다. 그의 민족주의적 관점이 시세영합이 아닌 신념일지라도 그가 최근 써낸 책의 제목을 보면그렇다. 대륙의 별, 장군 고선지/ 중원의 고구려, 제왕 이정기/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그 위대한 전쟁, 이덕일의천하통일 영웅대전 등등. 물론 지난주 출간된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은 좀 별개이지만.
이미 그는 단순한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의 책은 발간족족 역사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내걸고 있고, 급기야는 칼럼집(이덕일의역사사랑)까지 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말 한마디가, 글 한줄이 사람들의 생각을 휘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념은, 어떠한순간에도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한편 신념은,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이상 명명백백히 밝혀야 할 순간도 있다. 고통받는백성과 민중을 이야기하던 이덕일이 중원의 지배자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은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史禍? 士禍?
사화. 선비들의 죽음인가. 역사가들의 죽음인가. 공식명칭은 선비들의 죽음이나, 실제 죽은 이들 대부분은 역사를 기록하던 사관이라는점에서 역사가들의 죽음으로 쓰기도 한다. 나는 절대 죽음을 찬양하지 않지만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낸 것은존숭받을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사가(史家)로서의 이덕일, 그가 역사가들의 죽음을 다루었듯 역사가로서의 자신을 잘 추스리기를,그래서 훌륭한 역사가로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 by | 2008/02/08 01:07 | 서평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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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의 블로그에서 이덕일 저자와 관련된 글, 잘 읽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다산초당에서 2005년 출간되었던 <조선 왕 독살사건>의 최종 완결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전편이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에 비해, 이번 책은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조선왕조 500년사를 ‘독살사건’이라는 프리즘으로 통찰한 책입니다.
늘 금기시 되어온 ‘국왕독살’이라는 코드로 역사를 살펴보면, 대중들이 충과 효의 나라로 기억하고 있는 조선은 개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숨겨진 진실이 가득한, 전혀 다른 역사로 재해석됩니다.
이덕일 저자가 거듭된 연구 끝에 새롭게 펴낸 <조선 왕 독살사건> 최종 완결판,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세요.^^